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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은 부산에서 터를 잡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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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영남지역 당선인들이 26일 오전 경북 경주의 한 식당에서 만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왼쪽부터 김경수, 서형수, 박재호, 김부겸, 김영춘, 민홍철, 최인호, 김해영 당선인.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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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은 과거 군사독재정권 시절 가장 강한 ‘야도’였다. 광주·전남 등 호남보다도 야세가 더 강했다.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이 막을 내리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된 부마항쟁(1979년 10월)의 중심지였던 곳이기도 하다. 성난 표심으로 전두환 정권을 사실상 끝장낸 곳도 부산이었다.

1985년 12대 총선(한 지역구에서 2명씩 뽑는 중선거구제)에서 부산 시민들은 모두 6개 선거구 가운데 3곳에서 야당 후보만 두 명씩 동반 당선시켰다. 당시 호남은 모든 선거구에서 집권당인 민주정의당(민정당) 후보를 1위 또는 2위로 한 명씩 뽑아줬다. 소선거구제로 치른 13대 총선(1988년) 때도 부산은 금정(김진재) 한 곳만 빼고는 모두 야당인 통일민주당 후보를 선택했다. 부산은 당시 ‘민주화의 성지’로 불렸다.

부산이 보수적인 ‘여도’로 바뀐 것은 1990년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이 노태우의 민정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과 3당 합당을 하면서부터다. 이후 14대(여당 무소속 서석재 포함)와 15대, 16대 총선에 이르기까지 여당이 부산을 싹쓸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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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시 3당 합당에 대해 반대하며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모습.

5공 청문회 스타였던 노무현조차 14대 총선(1992년) 때 부산 동구에서 군사쿠데타의 주역 중 한 명인 허삼수에게 졌다. 17대(2004년) 총선부터 조경태 의원이 야당 간판으로 내리 3번 당선되고, 18대 때는 여당의 공천 파동으로 무소속과 친박연대 당선자가 6명 나오기도 했다. 이들은 당선된 직후 또는 시간을 두고 모두 여당으로 옮겼다.

부산은 지난 26년 동안 여당의 아성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경향이 얼마나 강했던지 2006년 지방선거 때 금정구의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 구의원 후보 한 명은 후보 등록 전 이미 사망해 선거운동을 한 차례도 하지 않았음에도 당선됐다. 이후 ‘부산은 새누리당이라면 죽은 사람마저 당선되는 곳’이라는 전설이 생겼다.

부산의 강고한 지역벽을 깨기 위한 줄기찬 노력은 노무현부터 시작됐다. 노무현은 14대 총선에 이어 1995년 초대 민선 부산시장 선거에 나섰다. 결과는 저조(37.5%)했으나, 그는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노무현은 2000년 16대 총선 때 지역주의와의 대결을 선언하면서 당시 당선이 유력했던 서울 종로를 떠나 다시 부산으로 내려갔다.

앞서 그는 1998년 이명박의 의원직 상실로 치러진 종로 국회의원 재선거에서 당선됐었다. 16대 총선 때 노무현은 북·강서을에서 35.6%밖에 얻지 못한 채 높은 지역주의 벽 앞에 또다시 무릎을 꿇어야 했다. 질 줄 알면서도 3번이나 도전한 그에게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노무현의 바통을 이어받은 사람은 노무현과 3당 합당 거부 등 행보를 같이한 김정길이었다. 김정길은 17대 총선에서 영도에 출마해 45.2%를 얻었다. 그는 2010년 부산시장 선거 때도 44.5%라는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그는 이후 정계를 완전히 떠났지만, 김정길의 정면 도전은 정통 야당 간판을 가지고도 부산에서 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노무현과 김정길의 빈자리를 이번에는 김영춘이 채웠다. 지역주의라는 괴물과 싸우기 위해 2011년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온 김영춘은 첫 도전에서 35.7%를 얻었지만, 부산진구의 골목에 자리를 잡았다. 박재호, 최인호, 전재수 등이 3번씩 연거푸 떨어지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부산을 지킬 수 있는 힘들이었다.

2014년 부산시장 선거는 야세가 되살아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줬다. 민주당 김영춘의 양보로 야권 단일후보가 된 무소속의 오거돈은 49.3%라는 놀라운 득표율로, 친박 핵심인 새누리당 후보 서병수(50.6%)를 턱밑까지 압박했다. 그리고 마침내 20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은 부산의 18석 가운데 5석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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