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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화의 나라 영국, 의료민영화 안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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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9일 영국 런던 중심의 웨스트민스터 다리에서 보수당 연립정권의 국가보건서비스(NHS) 민영화 움직임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친시장적인 연립정권은 복지급여를 대폭 삭감했으나 여론을 의식해 국가보건서비스 예산은 삭감하지 않았다. |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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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영리화가 바꾸는 세상] ③ 영국의 상징된 ‘공공의료’

“약도 안 주는 걸….”

아이를 안고 병원을 나오며 아내가 투덜거렸다. 이번이 세번째다. 지난해 9월 돌을 앞둔 아들이 열이 났을 때도, 11월 수두에 걸렸을 때도, 지난주에 열이 나는 아이를 들쳐업고 병원에 왔을 때도, 주치의인 루멘스 선생님의 처방은 늘 같았다. “약은 안 먹어도 됩니다. 괜찮을 거에요. 혹시 상태가 나빠지면 다시 오세요.” 그리고 이번에도 아이는 자기 힘으로 감기를 이겨냈다. ‘무상의료라서 약에도 인색한 것 같다’던 초보 엄마·아빠의 불평은 조금씩 사라졌다. 영국 국가보건서비스(NHS)를 현지에 와서 직접 경험하며 무상의료에 대해 품은 미심쩍음이 줄어들었다. 약을 주고, 주사를 놓은 것보다, 환자를 그냥 되돌려 보내는 것이 더 훌륭한 처방일 수 있다는 사실도 조금씩 배우게 됐다.

작은 병원뿐만이 아니다. 큰 병원의 서비스도 나쁘지 않다. 영국의 병원에 입원한 경험이 있는 가까운 한국인 지인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는 지난해 1주일 넘게 제법 큰 병원의 4인용 병실에 입원했다. 그곳에서 입원 환자들은 매일 아침 꽤나 긴 메뉴판에서 하루 세끼 식사와 간식을 취향에 따라 고를 수 있었다. 차나 음료, 간식은 환자가 원하면 언제든지 제공됐다. 침대 시트도 날마다 바꿔줬다. 게다가 병실에는 간호보조인들이 서로 교대하며 거의 24시간 네명의 환자만을 보살폈다. 한국에서처럼, 환자의 가족이 간병인으로 나설 필요가 딱히 없었다. 말하자면, 20여년 전 한국의 재벌병원이 등장하며 광고 카피처럼 내세운, 바로 그 ‘간병인 없는 병원’이 영국에 있다.

■ 굳건한 공공의료 ‘3대 원칙’

두 사례만으로 영국 NHS를 판단하기는 힘들지도 모른다. 우리 둘만 유독 운이 좋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특히 NHS의 거대한 규모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NHS는 잉글랜드 지역에서만 170만명을 고용하고, 한해 1089억파운드(186조원)을 쓴다. <비비시>(BBC)의 보도를 보면, NHS는 세계에서 다섯째로 많은 직원을 고용한 사업장이다. 미국 국방부(320만명), 중국 인민해방군(230만명), 미국 월마트(210만명), 맥도날드(190만명)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그러니 한두번의 경험으로 미루어 ‘NHS를 경험했다’고 섣불리 말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영국인도 아니고, 영국 땅에서 한푼의 직접세도 내지 않는 외국인 유학생마저 쉽게 체감할 수 있는 대목은 있다. NHS가 밝히는, 다음과 같은 3대 원칙이 영국 시골의 의료 현장에서도 지켜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첫째, 모든 이의 필요에 응한다. 둘째, 치료 시점을 기준으로 무상으로 제공한다. 셋째, 환자의 지급 능력이 아니라, 의료적 필요에 따라 제공한다. 따라서 영국 땅에 합법적으로 거주하는 이라면 가난하거나 돈이 없어서, 병원 앞에서 좌절하거나 마땅한 치료를 못 받는 일은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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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정부한테서 높은 평가 등급을 받은 ‘국가보건서비스(NHS) 파운데이션 트러스트’로 지정된 케임브리지의 애든브룩병원 임상연구소에서 앤드루 클라크(오른쪽)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한 소녀를 상대로 음식물 알레르기 피부 반응 검사 임상실험을 하고 있다. 케임브리지/AP 뉴시스

영국 복지국가의 상징인 NHS의 역사가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1948년 시작된 NHS는 영국 우파 정권들한테는 눈엣가시였다. 보수당 정권이 등장할 때마다 NHS는 민영화 시도의 표적이 됐다. 1982년 NHS가 겪은 위기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해 9월9일, 당시 집권 4년차를 맞은 보수당 정권은 아예 반나절의 일정을 털어 특별 각료 회의를 소집했다. 마거릿 대처 총리를 비롯해 장관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보고서 한권이 제출됐다. 보수당 계열의 연구소에서 만든 이 보고서의 핵심 내용의 하나가 ‘NHS 민영화’였다. 거의 모든 공공분야에서 민영화를 밀어붙인 대처 정권이 드디어 NHS에도 눈독을 들인 참이었다.

이날 회의 자리에서 심사숙고를 한 내각은 결국 NHS 민영화안을 보류하기로 결정했다. 대처마저도 여기까지는 용납하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대처는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 이렇게 기록했다. “보고서를 보는 순간 충격을 받았다. 나는 이 보고서의 내용이 곧 누설될 것이라 지적했다…보고서의 내용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의 예상대로 보고서 내용은 언론으로 흘러들었고, 뉴스를 접한 여론이 부글거렸다. 대처는 직접 진화에 나섰다. 같은 해 10월에 열린 보수당 전당대회에 그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연설을 했다. “보수당 정권 아래에서 NHS는 안전할 것입니다… 돈을 낼 능력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적절한 의료 서비스를 받아야 한다는 원칙은 NHS의 근간을 이룹니다.”

대처 정권 시기 큰 파고를 넘긴 NHS는 2010년 다시 큰 위기를 맞았다. 노동당에 10년 넘게 정권을 내준 보수당은 제3당인 자유민주당과 손을 잡고 그해 총선에서 집권에 성공했다. 연립정권은 곧 파격적인 재정긴축 정책을 단행했다. 핵심은 2015년까지 공공서비스 지출을 5분의 1이나 삭감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복지 분야도 예외가 아니었다. 정부는 실업자·장애인 등을 대상으로 하는 복지급여를 171억파운드(30조원)나 줄이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내놨다. 친시장적인 연립정권은 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영국의 국영 우정사업기관인 ‘로열메일’도 결국 2013년 시장에 내다 팔았다. 당연히 NHS의 운명에도 시선이 모였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복지 축소에는 불도저같이 매달리던 연립정권도 NHS만은 피해갔다. NHS는 교육, 대외원조와 함께 예산이 삭감되지 않은 분야로 남았다. 지난 1월6일 조지 오스본 영국 재무장관은 120억파운드(21조원)에 이르는 추가적인 재정지출 감축안을 발표하면서도 NHS는 예외로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쯤되면 궁금할지도 모르겠다. 민영화를 강하게 밀어붙인 역대 영국 보수당 정권들조차 NHS를 함부로 건드리지 않은 이유 말이다. NHS와 관련한 영국인의 자부심이 가장 큰 변수다. 2011년 <비비시>(BBC)가 보도한 설문 조사 결과를 보면, 영국인의 정서를 엿볼 수 있는데, 영국인 10명 가운데 7명꼴(69%)로 NHS가 자랑스럽다고 답했다. 영국의 여러 상징 가운데 NHS는 여섯번째로 순위가 높았다. 1등은 셰익스피어(75%)였다. 내셔널트러스트(72%), 영국군(72%), 국기(71%), 파운드(70%) 등이 뒤를 이었다. 영국 왕실(68%), BBC(63%), 비틀즈(51%)는 NHS의 인기를 따라오지 못했다. 민영방송인 <채널4>에서 2010년 실시한 다른 설문 조사에서는 NHS(37%)가 영국인 10명 가운데 4명의 선택을 받았다. 복수응답이 가능한 이 설문에서 NHS는 ‘영국 역사’(45%)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지지를 얻었고, 영국군(36%)이나 왕실(28%)보다 높은 인기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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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9일 영국 런던 중심의 웨스트민스터 다리에서 보수당 연립정권의 국가보건서비스(NHS) 민영화 움직임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친시장적인 연립정권은 복지급여를 대폭 삭감했으나 여론을 의식해 국가보건서비스 예산은 삭감하지 않았다. 런던/신화 뉴시스

공공의료 국민들 자부심 커 제도운영 높은 평가 받아
대처도 여론 의식해 손 못대 복지분야 재정긴축때도 삭감 없어
시장화된 미국 의료제도 비교하면 의료비 절반 수준인데 수명 더 길어

‘간병인 없는 병원’ 4인용 병실서도 호텔급 서비스
끼니마다 취향껏 메뉴 고르고 간호보조사가 24시간 돌봐줘

■ 영국 왕실보다 높은 인기

NHS의 인기를 이른바 ‘복지 포퓰리즘’의 결과라고 깎아내리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NHS가 오랫동안 보여준 성과가 있어서다. 공공성을 강조한 NHS의 성과는 세계에서 가장 시장화한 미국 의료제도와도 종종 함께 저울대에 오르는데, 간단한 수치만 살펴봐도 영국의 성과는 미국을 압도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자료를 보면, 영국인이 한해 의료비에 3405달러를 쓰는 동안 미국인은 8508달러를 지출한다. 미국인의 의료비는 영국인의 2배를 훌쩍 넘는다. 그러나 정작 영국인의 평균 수명은 81.1살로, 미국인의 78.7살을 앞지른다. 미국은 국내총생산(GDP)의 17.7%에 이르는 막대한 부를 의료 비용으로 쏟아붓고도, 훨씬 적은 돈을 쓰는 영국(9.4%)보다 성과가 저조했다.

조금 더 정교한 연구에서도 영국의 의료제도는 미국보다 후한 평가를 받고 있다. 2001년 세계보건기구(WHO)가 평가한 보건의료제도 평가 순위에서 영국은 전체 191개국 가운데서 18위를 차지했다. 프랑스(1위), 이탈리아(2위), 일본(10위) 등에는 못미쳤지만, 스웨덴(23)이나 덴마크(34위) 등 쟁쟁한 복지국가들보다 앞섰다. 반면 미국은 한참 뒤진 38위에 머물렀다. 한국은 좀더 뒤처진 59위였다. 영국 본머스대학 콜린 프리차드 교수 등이 2011년에 내놓은 논문을 보면, 영국의 NHS는 OECD 회원국 의료 시스템 가운데 아일랜드에 이어 두 번째로 좋은 평가를 받은 반면, 미국은 바닥권인 17위로 평가됐다. 한국은 연구에 포함되지 않았다. 지난해 미국의 언론사인 <블룸버그>가 주요 국가의 의료제도 효율성만을 비교한 내용을 보면, 영국은 48개 조사 대상 국가 가운데 14위의 평가를 받았고, 미국은 이란과 세르비아의 사이에서 46위에 머물렀다. 한국은 상대적으로 후한 8위를 받았다. 물론 의료제도를 국제적으로 평가한 기준을 두고 학술적인 논란이 적지 않다. 따라서 이 자료들은 참고용으로만 보는 것이 나을 듯하다. 그러나 공공성이 강한 영국의 NHS가 미국 의료제도보다 항상 앞선 평가를 받는 점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 대처 굴복시킨 각료들

1980년대로 다시 돌아가서 대처 정권과 NHS의 관계를 돌아보면, 흥미로운 반전을 읽을 수 있다. 영국의 언론인 존 캠벨이 2003년에 쓴 대처의 전기에서는 당시 보수당의 ‘NHS 민영화’가 좌절된 과정과 관련해 조금은 다른 서술을 발견할 수 있다. 1982년 보수당 각료회의에 나온 문제의 보고서가 작성되도록 배후에서 조종한 사람이 다름 아닌 대처였고, NHS 민영화가 각료회의에서 주요한 의제로 오르도록 막후에서 ‘사전 조율’한 이도 대처였다는 설명이다. 전기는 “문제의 보고서가 대처의 승인 없이는 내각 회의에서 회람될 수 없는 것이었다”고 근거를 제시했다. 그렇다면, 왜 대처도 내심으론 원한 NHS의 민영화가 좌절됐을까. 이유는 다름 아닌 보수당 내부의 반발이다. 다음은 전기의 한 대목이다. “대부분의 장관들이 나서서 (NHS를 민영화하는 것은) 엄청난 실수를 하는 것이라고 대처에게 말했다. 이런 의견이 모아진 다음에, 대처는 분을 이기지 못한 말투로 ‘알았어요. 이 건은 보류합시다’라고 말했다.” 전기의 이 설명은 2012년 30년 만에 비밀 해제돼 공개된 정부 자료에서 사실로 입증됐다. 당시 <가디언>의 보도를 보면, NHS를 민영화하려는 대처의 구상에 맞서 각료들이 사실상 ‘반란’를 일으켰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기세등등하던 대처도 장관들의 집단행동에는 굴복한 것이다. 대처는 회고록에서는 NHS 민영화를 자신이 추진했다는 사실에 시치미를 뚝 떼고, 자신도 NHS 민영화에 반대한 양 거짓 진술을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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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부문의 민영화를 영국 경제의 만병통치약으로 여긴 대처도 결국 이런 상황 속에서 의료 분야는 감히 건드리지 못했다. 그는 철도의 민영화에 대해서도 “너무 나간 것”이라며 반대했다. 그래서 대처 정부가 밀어부친 주요 공공 분야 민영화의 급류 속에서 살아남은 ‘유이’한 분야가 다름 아닌 의료와 철도다. 달리 말하자면, 이 두 분야만은 철의 여인 대처마저도 여론의 반발이 두려워 감히 손대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한국에서는 이 두 분야를 시작으로 민영화가 추진되고 있다. 이를 밀어붙이는 한국 정부는 딱히 국민이 두렵지는 않은 모양이다. <끝>